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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을 꿈꾸며

새마을이 2010. 3. 22. 19:35

 

 

발해(渤海)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을 꿈꾸며

 

공학박사 김 정 윤     
(사)동북아문화교류협회장

(2006. 7.)
                                                       
        

  잊어버린 땅, 그러나 반드시 찾아야 할 땅, 아! 연해주

  필자가 동북아문화교류협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이유는 여럿이지만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은 발해의 고토회복이다. 가까운 지인(知人)들을 만날 때마다, 연해주 땅을 확보해야 된다고 주장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라고 걱정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일이 있느냐고도 하지만, 최근의 국제정세와 급변하는 러시아 정치환경과 수교 16년 동안 양국 관계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충돌위험은 한 낮 기우에 불과하다.

 지난 3월 8일 러시아 최대 경축일인 여성의 날에 즈음하여 국가두마(하원) 외교위원장인 코샤예프는 극동러시아 개발과 번영을 위해서는 극동러시아의 무궁무진한 자원과 북한의 제대군인들을 이용한 노동력과 남한의 기술과 자본이 결합하는 삼위일체형의 트라이앵글방식의 개발이 가장 바람직하며 이것에 대해서는 남・북한의 전문가들과 러시아의 정책당국이 절대적 지지를 보내는 바이지만, 한국정부와는 금년과 내년 선거(07년 12월 19일 대통령선거)로 인한 만약 정권이 바뀔 경우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어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극동러시아 중에도 연해주개발 최고의 파트너는 남・북한이라고 연설하였다. (필자는 이날 코샤예프가 연설하는 방송을 연해주 출장 중 블라딕보스톡 공항 휴게실에서 보았다.)
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할 때마다 지근에서 안내하는 콘스탄틴 폴리콥스키 극동총독(푸틴 대통령의 정권 권한대리인)이 지난해 말 경질되고 후임으로 부임한 카밀 이사하코프(47세, 전 카잔시장을 지낸바 있고, 회교도이며 특수업무 경력자)는 미・소간의 냉전시대일때 극동러시아는 최고의 전성기였고 이때 군대를 포함한 거주인구는 무려 1,300만 명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반이나 줄어들어 650만 명이 약간 넘는다.
  거주 제한 해제이후 극동러시아에 거주하는 동구사람인 독일계, 유대계, 우크라이나인, 백계러시아인 등이 대거 고향으로 돌아간 반면에, 1937년 중앙 아세아로 강제이주한 고려인 17만여 명의 후손들이 50만 명이나 늘어났지만 고향인 극동러시아로 돌아온 사람은 겨우 7만 5천 명 정도이다. 이래서는 극동러시아 번영이 불가능하니 극동러시아개발을 위하여 150만 명의 산업일꾼을 유치할 필요가 있고 대상자는 러시아와 우호관계가 가장 돈독한 남・북한과 베트남 등이라며 산업일꾼의 유치방법은 완전 이주자에게는 러시아 국적을, 투자자에게는 영주권을, 계절일꾼(농업종사자)에게는 취업비자를 줄 수도 있고 광산물과 농수산물 생산을 위해서는 러시아 영토의 부분적 양도도 고려하고 있으며 이러한 중요내용들을 푸틴 대통령께 보고했고, 긍정적 답변을 얻었다고 말했다.

 우리는 국가두마 외교위원장과 극동총독이 작년과 금년 연이어 한국과 관련한 충격적인 발언을 왜 하는가에 대하여 주시할 필요가 있는데 그 배경에는 연해주 일정지역에 “고려인자치구역” 건설이 내포되어있고 지금까지 추진되어온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고려인들에게 대한 러시아당국의 조치

 

① 러시아 연방정부(옐친대통령 시절)는 포고령 제64호 반포함
   제64호 내용은 1937년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의 정책은 잘못된 정책으로, 이에 대한 연방중앙정부의 사과의 표시로서, 연해주로 돌아오는 고려인들에게 군대가 철수한 지역을 영구 무상 임대토록 하는 조치이다. 이는 러시아 연방최고회의 결정 제472-1호(93.4.1)의 후속조치임.

 

② 포고령 제64호의 추가지시로 연해주지방정부 소수민족 담당국장(자이카 지나이다 여사)을 대변인으로 지명하여, 연해주지방정부는 고려인 중심마을 (1,500명 정도)을 30-35개정도 만들 수 있도록 법정 정비했음을 발표함. (법령 정비는 1997년 5월이었고, 발표는 동년 10월 한국에서 개최한 국제세미나에서)

 

 ※ 상기 포고령과 결정문을 검토해 보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고려인 및 한민족들이 일정지역에 1,500명 단위의 30개 마을을 설치 운영하면, 자치군구(郡=okrug)를 연방중앙정부 또는 극동총통에게 신청할 수 있다고 해석됨. 다른 자치지역과 비교해 볼 때, 전혀 법률적 제한이 없다는 러시아주재 국제 전문변호사들의 의견임.
    일부 변호사와 학자들은 고려인 3만명 정도로 마을을 구성하고, 10년 이내에 1만 5천명을 추가하면 자치구역이 성립된다는 의견도 있음.

 

③ 그러나 극동군 관구사령관은 고려인 자치구역 건설이 절대로 불가한 지역을 이미 선포하여 두었고, 연방중앙정부도 동조하고 있음
   불가 지역을 열거하면,
   ⑴ 국가 기간도로(국도 및 고속도로)가 있는 곳
   ⑵ 외국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시설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
   ⑶ 국가 기간철도(기차 및 전차)가 있는 곳
   ⑷ 이미 개발된 지하자원이 있는 곳으로, 국가가 관장하는 곳
   ⑸ 국가 기밀시설이 있는 곳 (예컨대 대륙탄두 미사일기지와 핵무기 저장시설)

   상기 내용을 살펴볼 때, 연해주 내의 고려인 자치구역 건설지역은 블라디보스톡・우수리스크・나홋카・스파스크・아르센네프 등 주요도시를 제외하면, 호롤군(농업생산성이 가정 높은 곳)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며, 대형기종이 이착률 할 수 있는 규모가 매우 큰 사용하지 않는 군용비행장이 인근에 있음.

 

④ 러시아민족문화자치회는 1996년 3월에 채택된 “민족문화자치회에 관한 법령”에 따라 사회단체 기관으로 성립되어, 이것을 근거로 1997년 8월 1일자로 러시아 연방정부는 연해주 고려인들을 위한 “영토 없는 고려인 문화자치주”를 선포함. 이로써 연해주 고려인들은 모든 문화행사와 고유의상, 언론, 언어, 학교설립, 고유종교 등을 자유롭게 활동 및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함.

 

⑤ 2003년 11월 10일 러시아연방 푸틴대통령은 “민족문화자치회에 관한 법령 개정안”에 서명하였으며, 이것은 곧 연해주 고려인 자치구역을 건립할 수 있는 러시아연방 법령의 법적 토대임이 공식화되었음.

 

⑥ 2004년 12월 21일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 재)국제농업개발원 이사장 박의근과 본회회원인 이병화 원장은 러시아 대사관의 공사 및 부대사의 직함을 가진 발레리 수히닌(한・러 및, 북・러 정상 회담 때 통역관이며 연해주 자치구역 건설의 러시아측 실질적 협상 파트너임)과의 면담때 러시아 당국은 「고려인 자치구역」은 용어자체가 매우 예민하므로 다른 용어로 사용하자는 제의에 따라 「한・러 연해주 농업개발 협력기구」라고 표현키로 잠정 합의 봄. 이날 이후 북한측의 항의에 따라 「한・러...」를 「고・러 ...」로 수정하였음.

 

(2) 상기내용들에 대한 러시아측의 전략

 

① 한・소 양국 수교 때(1991년) 한국측이 제공한 차관 14억 7천만 불을 러시아당국은 2003년 8월     까지 현물상환으로 3억 7천만 불 갚은 바 있음.

② 2003년 9월 이자포함 원리금 22억 4천만 불을 한국측과 협상으로 6억 6천만 불을 삭감하고      15억 8천만 불만 갚기로 합의 함 (한국측 : 김진표 전 부총리)

③ 2006년까지 방산물자와 KA32형 H기 등으로 2억 5천만 불을 상환하고 잔금 13억 3천만 불은     2007년부터 향후 10년까지 현금으로 상환한다.

 

 ※  상기내용은 한국의 경제관료와 정치인들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지 않은 사항이나, 러시아 중앙정부와 극동러시아 총독 및 산하관료들은 잘 알고 있는 사항으로 러시아는 2007년 12월 한국의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 따라 재협상을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
    동북아문화교류협회 회원을 포함한 러시아 전문가들은 13억 3천만 불 중 10억불은 「극동러시아 자원 개발기금」으로 한・러 공동펀드를 만들고, 나머지 3억 3천만  불을 연해주 농업개발
    협력지구에 투자한다는 의견을 타진한 결과, 러시아측 전문가들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음.


④ 러시아측은 차관상환과 연해주개발을 반드시 결부시키려는 의도를 표명한 바 있음.

 

(3) 필자의 판단

 

  2004년 10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중국의 국가 주석 후진타오와 정상회담 때, 극동러시아 거점 도시 하바로브스크시의 아무르강 일대 「타라바로브」섬과 「볼쇼이 우수리스크」섬 일부를 중국측에 영구 무상 조차하였다. 이곳의 면적은 337k㎡(약 1억 평으로 여의도의 110배의 면적)로써, 후진타오는 이곳을 5년 이내에 약 30억불을 투자하여 국경 중계무역 거점도시를 만들겠다고 약속하였고 현재 맹렬히 건설중에 있다.
  한편 러시아 연방정부는 연해주의 일정지역을 한국자본이 투자되어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는 농업도시건설 구상에 중국 중앙정부의 이해와 협조를 구했다는 정보가 있다.
현재(2006.3월) 러시아 우랄산맥 동쪽의 전지역(사할린 포함)에는 중국 국적의 생필품 장사꾼들이 약 120만명이나 활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필요악(必要惡)일수 있다. 러시아 정부가 아무르강 일대의 섬을 중국측에 할애해준 것은 중국측의 내수경제 잠식을 봉쇄하자는 전략이고, 반면에 한국측의 농지매입을 권장, 묵인하고 “고・러 연해주 농업개발협력기구” 설치를 권유하는 것은 극동러시아 번영과 주민들의 경제활성화 이외에도 남・북한과의 협력이 중국과 일본의 간접침략 방어에 대한 안보 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을 판단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동북아 중심의 미묘한 정치적 작용은 역설적으로 한국인들의 연해주 진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로부터 절대적 환영을 받고 있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전의 분위기로 연해주 역사는 윤전(輪轉)하고 있다. 두 번 다시 이러한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들은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두려움 없이 연해주로 행군해야 한다.

 

극동러시아와 연해주 환경

 

  푸틴 러시아연방 대통령은 정권을 쥐자마자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이 러시아 전영토를 7곳으로 분리하여 정권권한 대리인으로 총독을 임명하였는데 이것은 러시아 군대조직인 7개의 관구(管區) 구역과 동일하다. 7개 지구와 행정수도를 살펴보면
중부 연방지구(모스크바), 볼가 연방지구(니즈니 노브고로트), 북‧서 연방지구(상트페테르부르크), 북카프카즈 연방지구(로스토프 나 도누), 우랄 연방지구(예카테린부르크), 시베리아 연방지구(노보시비르스크), 극동 연방지구(하바로브스크) 등이다.
극동 연방지구(총독 : 카밀 이사하코프) 산하에는 자치정부 조직으로 사하(행정수도=야쿠치야) 자치공화국과 유대인 자치주(비로비쟌), 츄코트카 자치주(아나다르), 그리고 코락자치군구(팔라나) 등이 있고 일반 행정주(州) 보다는 약간 권한이 많은 광역주 개념의 하바로브스크주(하바로브스크)와 연해주(블라딕보스톡) 두 곳이 있고, 일반주인 사할린주(유지노 사할린스키), 마간단주(마가단), 아무르주(볼라고베찬스키), 캄차가주(페트로 파블로브스키) 등 모두 합하여 10개의 지방 행정정부가 있다. 7개 연방지구내에서 극동 연방지구는 유일하게 자치공화국과 자치주, 자치군구가 존재하고 있고 향후 고려인자치군(郡)이 생기고 이것이 발전하면 자치주로 승격도 가능하다. 츄코트카주는 4년전까지만 해도 자치군구였으나 대단위의 석유매장 덕분으로 주단위로 승격되었다.

 

- 참고자료 : 자치구역 현황과 변천사 -
  러시아내 자치구역(소수민족행정구역)을 살펴보면 21개자치공화국과 2개자치주(oblast)와 9개자치군구(okrug=郡)가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결성과 1924년 연방헌법발효이후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따라 지금까지 건설 또는 성립되어 왔다.
 극동러시아의 경우 지금의 사하자치공화국은 자치주(州)로부터 출발했고, 유태인자치주 역시 okrug(郡)로 출발했고, 추코트카자치주는 불과 4년전에 자치군구에서 승급했다. 보하이(渤海)후예라는 코략(高麗岳)인들의 코략자치군구는 나날이 인구가 줄어들어 승급은커녕 오히려 자치군구 자체가 소멸될 지경에 와 있다.(3만명 미만이면 자치구역이 취소되는 법령있음)
  다시 정리하면 극동러시아 지역은 자치공화국 1개 지역, 자치주 2개 지역, 자치군구 1개 지역 등 소수민족 행정구역단위가 모두 있는 아주 특별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극동러시아 자원을 살펴보면 남한의 면적보다 64배가 되는 넓은 땅에 거주인구는 서울인구의 절반이 조금 넘는 650만명에 불과하지만, 석유 매장량은 러시아연방 전체의 약 50%가 되고, 가스매장량은 약 70%, 석탄 60%, 목재가 약 35%, 그리고 수산자원이 약 85%, 다이아몬드가 약 70%, 금이 약 50%, 납과 우라늄이 약 70%이며, 휴경되고 있는 농지는 논‧밭과 초지를 합쳐 무려 1,200만Ha로써 남‧북한 총 농지면적의 3배가 넘는다.
한편 연해주는 극동러시아의 농업, 목재, 수산가공의 중심지이고 생필품의 공급기지이자 국제무역의 요충지로써 시베리아 철도의 시발점과 종착점이기도 하고 러시아 유일의 부동항인 블라딕보스톡항이 연해주정부 수도이기도 하다.
연해주 총면적은 남한의 약 2배가 미처 못되는 16만 5천㎡이나 인구는 약 200만명으로 극동러시아 전체인구의 1/3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극동러시아 총 농지면적 1,200만Ha중에서 최고의 기름진 옥토인 논‧밭과 초지가 남‧북한 총 농지합한 면적과 비슷한 약 385만Ha나 된다. 또 북한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여 직선거리로 약 19㎞를 마주하고 있고 일주일에 두 차례씩 평양을 출발하여 모스크바로 가는 국제국경열차가 운행되기도 한다.

 

  이제 한민족 분포현황을 살펴보자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러시아를 한민족 박물관이라고 역사학자들이 표현 할 정도로 다양한 배경은 가지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은 약 13만 8천여 명으로 그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37년 강제이주 전에 연해주와 하바로브스크에 살다가 강제이주 후 다시 귀향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약 7만 5천명,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동시에 남사할린과 쿠릴열도 4개 섬 지역을 구소련에 양도함에 따라 이곳으로 징용가서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과 일가족들, 그리고 자손들이 현재 사할린에 거주하는 사람과 극동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을 포함하여 약 4만 5천명, 45년 해방이후 좌우익 세력이 신탁통치안에 관한 찬반으로 엇갈렸을때 38도선 이북에서 공산세력의 신탁을 반대하다가 극동러시아지역에 노동자로 팔려와서 귀국치 못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약 3천명, 6.25전쟁 후 1953년 휴전때 남한에서 북한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극동러시아로 돈벌이에 차출되어 귀국치 못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약 2천명, 후르시초프수상 통치이후 지금까지 극동지역에 노동자(벌목공, 수산일꾼, 탄광일꾼, 농업 및 건설노동자)로 돈벌이 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은 미귀환자(북한당국은 중국으로 간 사람은 탈북자라고, 하고 러시아에서 귀국치 않은 사람은 미귀환자라고 함)가 약 1천 5백명,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사생아(라이따이한)들을 북한은 1980년도부터 94년 김일성이 죽기전까지 약 800명을 평양에 불러와 간첩교육을 시켰는데 이들 중 약 150명이 극동지역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고, 일본조련계소속의 사람들이 약 100명, 북한보위부 관장아래 돈벌이하는 북한 일꾼들이 약 9,700명, 한국의 상사원과 유학생 및 선교사들이 약 1,300명 등 있다. 다시 정리해보면 1937년 강제이주후 귀향하여 거주하는 사람이 7만 5천여 명, 일본에서 편입된 사할린 사람들이 4만 5천여 명, 해방이후부터 6.25전쟁과 휴전을 거쳐 1955년까지 북한에서 노동자로 팔려온 사람이 5천여 명, 한-소 수교이후부터 지금까지 벌목장 및 수산현장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을 제외한 미귀환자 1천 5백여 명, 라이따이한과 조련계출신 250여명, 북한일꾼 9,700여명, 한국인 1,300여명 등 합계 13만 7천 740명이 거주 및 활동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푸틴정부는 우랄산맥 동쪽(시베리아 방향)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생필품장사꾼 120만명 중 1/10은 조선족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연해주내에서 활동하는 고려인들은 얼마나 될까?
2005년말 러시아연방 보안군(전KGB) 자료에 의하면 중앙아시아 귀향자 약 3만 2천명, 사할린에서 건너온 사람 약 2만명, 합계 5만 2천여명이며 특이사항은,
  중앙아시아 귀향 고려인 = 한국어를 못하고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해 있으며 농사기술이 능하                              고 자식들은 대부분 모스크바에서 거주한다.
  사할린 도해(渡海) 고려인 = 한국어와 일본어를 구사하며 사회주의 체제에 매우 거부감이 몸에                               베여있고 농사기술은 전무하고 자식들의 학업은 극동지역을 근거한다.
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이들 두 분류의 고려인들은 서로 융화하지 못하여 매사에 충돌을 일이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려인과 연해주 농업개발

  1858년, 지금으로부터 146년전 아이훈(愛煇)조약 이후 1860년대를 거쳐오면서 시작된 한인들의 연해주이주는 1902년 한인들의 이민자수는 32,380명, 1914년 한인 교민수 6만 3천여 명의 피와 땀으로 블라딕보스톡에 신한촌건설, 1918년 일본군대 연해주점령, 1922년 일본군대철수, 1923년 재소(在)한인 공식 10만여 명 실제는 25만 명 이상 거주, 1932년 연해주 한인학교(기술사범학교, 교원대학 포함) 380개소 운영과 신문 및 잡지 13종 발행, 1937년 7월 중‧일전쟁, 1937년 9월 21일 스탈린의 원동 변경지역 고려인 이주에 관한 일급비밀지령에 따른 중앙아시아(6천㎞)로 강제이주, 우즈베키스탄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스탄 20,170가구 95,265명, 노보시비르스크 11월 15일 마지막 도착열차(총 36,422가구에 171,781명)이주 직전 한인지식인 2,500명 총살시킴, 이상은 대략적인 연해주 한일들의 이주 역사이다.
1860년대에 연해주로 이주한 초기의 한인들은 대부분 함경도지역 출신이었다.
1880년도부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순전히 배고파서, 먹고살기 위하여 새로운 삶을 찾아나선 농업개척자이기도 하였다.
두만강을 건너 제일먼저 정착한 곳이 지금의 단강(丹江:레베딘카)주변이었고, 가구마다 쟁기질을 위한 소와 말이 있었고, 강과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대부분 반농반어가(半農半漁家)로 짐작이 되는데 당시는 두만강의 일부 줄기가 단강으로 흘렀다는 기록이 있고, 특히 단강(레베딘카)지역과 한마당(라즈돌리네)지역에는 지금도 1937년 강제이주 때 수확하지 못하고 내버려둔 논에서 야생 벼가 자라고 있는데 1991년 MBC TV와 전(前)농림부장관이였던 김성훈박사께서 발견하여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이후 한인들은 강제이주 되기까지 더욱 북상하여 지금의 핫산 라이온(군:郡)을 벗어나 우수리 평원과 흥개(興凱:항카)평원까지 진출하였고, 이때쯤은 이미 한인들의 인삼(장뇌) 재배단지가 야누친스키지역에 대규모로 조성되었는데 강제이주당시 약 600만평(여의도면적의 7배)이 수확을 못하고 그냥 두고 갔는데 요즘 「시호테알린」산맥에서 발견되는 산삼들이 대부분 60~70년생인 것으로 보아 당시의 인삼들이 짐승들에 의해 번식되어 야생화 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한편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던 한인들(이후부터는 고려인으로 표기)의 농업기술은 대단하여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김병화콜호즈(협동농장)와 황만금콜호즈는 소련 전역에서 단위당 수확량이 가장 높아 최고의 명성을 얻었고, 전(全)인민 최고노동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카자흐스탄지역도 강제이주 9년 전인 1928년도에 먼저 이주하여 정착한 고려인들과 합류한 크질오르다주(州)의 경우 아방가르드소프호즈(국영농장)와 인터내쇼날콜호즈 역시 벼농사 최고의 수확량(1Ha당 벼 5.8T/M)을 올려 노력영웅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인들의 농업기술은 전체 소련에서 인정받았고 경종(耕種)농업은 바로 고려인 자체였다.
  본회의 자문위원인 이병화 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한인(韓人)들의 연해주 이주는 한민족의 해외농업 역사(歷史)이고, 연해주 농업개발은 고려인의 역사이며 영혼이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닮아가는 한국인․고려인과 극동러시아인들
 
  모스크바 사람들은 약간 어눌하고 좀 모자라는듯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비아냥거리는 말로 “우랄산맥 넘어 왔냐”라고 한다.  이것은 미국 뉴요크들이 “서부촌놈들” , 일본 도쿄사람들이 “오키나와 출신이냐” 중국 북경사람들이 “신장(新彊)에서 왔냐” 한국 서울사람들이 “강원도 촌놈” 등의 소리와 다름 아니나, “우랄산맥을 넘어 왔냐” 라는 소리에는 수많은 애환과 질곡의 역사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우랄산맥을 중심하여 서쪽은 유럽인 풍습의 생활양식이 뿌리내려 있고 동쪽은 아시아권역으로 동양인(황색종) 풍습에 러시아인 생활양식이 가미된 퓨전 형태의 삶이 개방화 물결로 인하여 점차 동양 색채로 물들어져 가고 있다.
  1917년 레닌의 10월 혁명이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우스카레니예(촉진)」등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대전환이 있기까지 68년동안 우랄산맥 동쪽은 많은 자본주의 사상가와 귀족들, 지식층과 그들이 말하는 불순분자(?)들의 유배지였다. 바로 시베리아 벌목장도 연어가공공장도 강제수용내에 있었다. 그들은 원 주민인 몽골반점의 황색인종과 융화될 수 밖에 없었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문학의 원천과 소재가 되었다. 다시 말해 원 주민의 샤머니즘과 시베리아와 극동러시아의 황량한 벌판과 매서운 바닷바람은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고 이것의 영향으로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와 솔제니친의 “이반 테니소비치의 하루”와 “암병동”이란 세계적 명작 등을 낳게 되었다.
 러시아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우랄산맥 동쪽 사람들은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이고, 흥분을 잘한다. 스웨덴의 한림원 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사람들이 문학(소설, 시)과 체육예술(발레와 체조) 그리고 미술과 음악이 뛰어난 것은 그들의 민족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국인과 그리스인들의 기질이 이들과 닮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은 극동러시아인들의 전래되는 속담들인데 내용들이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고 친근하여 소개하여 본다.
 
  ※ 닫지 못한 문은 열지를 말아라
이것은 예시당초 마무리 하지 못할 일은 하지도 말자는 뜻이고 손해를 보더라도 사나이 의리를 더 중요시 하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 술잔에 남기는 술은 곧 눈물이 된다.
매사에 끝마무리를 잘하자는 뜻이며 술병에 남기는 술은 괜찮으나 입술이 다은 술잔의 술을 남기는 것은 계약파기를 암시하는 것이고 친구나 애인사이라면 인연을 끊자는 뜻이다.

 

  ※ 술 잘먹고 주먹세고 거시기 크면 형대접 받는다.
미국의 서부 카우보이식 생리적 기질이 묻어 있다. 즉흥적 기분으로 계산적이지 못하고 의리를 중시하여 조직폭력배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 러시아에는 사투리가 없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사투리가 없다. 이것은 레닌이후 1985년 거주제한 해제 때까지 서쪽사람은 동쪽으로, 동쪽사람은 서쪽으로 보내고, 남쪽사람은 북쪽으로, 북쪽사람은 남쪽으로 보내고, 군인・공무원들을 포함한 모든 국가 월급쟁이들을 출생지의 반대쪽으로 분산시켰기 때문에 사투리(지방방언)가 뿌리 내리지를 못했다. 일례로 서쪽이 있는 체첸전투에서 병사들이 전사하면 곡(哭)소리는 연해주에서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주 분산정책이 없어졌음으로 사투리가 곧 뿌리 내릴것이다.
 
  ※ 여자나이 40에 외손주를 못 보면 러시아 여자 아니다.
러시아 여인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이팔청춘 16-18세 나이다.  이때가 결혼적령기이다. 37세에 외손주 본 여인들이 무료하여 밤거리에 나오기도 한다. 무능한 남편을 쫓아내고 혼자사는 여자들이 많다. 오죽하면 토요일은 이혼녀 결혼하는날이고 나머지날은 처녀가 결혼하는날로 정한 지역이 있을 정도인데 40세 넘은 여자는 집에서 손주들 재롱보는 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 40도(영하) 추위는 추위도 아니고 40도 술은 술도 아니고 400km 거리는 길도 아니다.
40도가 넘는 추위를 견디려고, 최전방의 병사가 40도가 넘는 보드카를 구입하기 위해 탱크를 몰고 400km나 달려 마가진(슈퍼마켓)까지 온 사례이후 전래되는 말이다.(실제는 140km 거리를 달렸다고 함)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670km 거리와 같은 하바로브스크에서 블라딕보스톡까지 670km를 자동차로 출장왔다가 당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흔하다.  나라가 넓다보니 한국사람들의 거리 감각보다 차이가 많이 난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마누라와 같이 타는 놈 같다.
머저리나 바보로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지금은 6박 7일 걸리지만 과거에는 11박 12일이나 걸렸다. 총 연장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침대열차이고 2인승과 4인승으로 되어 있는데 남‧여 구별없이 같이 타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정열적인 러사아인들이라서 염분(艶紛)나기 십상이다.이상과 같이 몇 가지를 열거해 보았다.

 

  단국대학의 명예교수인 구천서 박사는 극동러시아 사람들의 식생활을 조사한 결과 고려인들이 즐겨먹는 보신탕(개고기)과 순대, 김치, 왕만두, 젓갈 등을 즐겨먹고 콩나물도 키워 먹는다고 지적하면서 슬라브족인 러시아인과 엥글로섹션족인 미국인과의 비교를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인들의 거주지에 미국인 한 가구가 이사를 온지 1년 후에 가보면 한국인들이 모두 미국음식인 햄버거를 먹는 반면, 러시아인 거주지에 한국인 한 가구가 이사 간지 1년 후에 가보면 러시아인들 모두가 순대와 젓갈, 김치 등 한국음식을 먹고 있다. 극동러시아인들은 한국인들이 러시아인에게 닮아가는 것 보다 더 친밀히 한국인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피부색의 선호도는 오히려 황색이 흰색보다 우선한다. 분명 한국인‧고려인들과 극동의 러시아인들은 서로 닮아가고 있다. 원인이야 당연히 징키스칸에서 찾아야되겠지만,”
 

 연해주는 한민족의 희망이다.
 
통일노래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 서육남(俆六男)은 러시아민요 카츄사에 가사를 이렇게 만들어 부르고 있다.

  연해주는 한민족의 희망.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
    용맹무쌍한 우리선조들의 고동소리 들려오는 곳

   연해주는 한민족의 희망. 독립운동의 선구자들이
     민족웅비의 큰 뜻을 세우는 숨소리가 전해오는 곳

   연해주는 한민족의 희망. 고려인의 문화자치주
     한민족 얼을 더욱 배양시켜 완전 자치구를 건설합니다.

   연해주는 한민족의 희망. 남・북한과 러시아 함께
     농목축산과 에너지 개발해 남북통일 앞당깁시다.
     라....             라....             라....
     농목축산과 에너지 개발해 남북통일 앞당깁시다.

만약 오늘 남한의 임진각역과 북한의 개성역이 서로 개통이 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가 가동된다.
  부산에서 환적한 화물이 곧바로 철도를 통하여 유럽으로 갈 수가 있어 그야말로 남・북한은 지    구촌의 축(軸)이 되고 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
 
  ※ 남북한의 식량문제가 담숨에 해결된다.
  연해주에 한국인들이 확보한 제주도 넓이의 2배나 되는 농목지에 재배된 농산물이 열차로 북    한을 관통하여 운반하면 「무관세 원양선단 기법」에 준거하여 관세없이 반입되기 때문에 한    국농업은 가장 값싼 식량 및 사료작물(밀, 옥수수, 콩)을 확보하여 식량안보와 육류자급의 선진    국이 될 수 있고, 아울러 북한식량문제도 단숨에 해결된다.

 

  ※ 시베리아 에너지(석유‧가스와 목제 및 광물)를 곧바로 철도로 운반하기 때문에 경제적 이익    은 수치로 논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의 주무대가 바로 연해주이다. 연해주는 중국의 죽(竹)의장막과 구소련의 철(鐵)의 장막 해제이후 우리들 한민족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다. 


연해주개발 프로젝트는 우리들이 반드시 복구해야 할 한민족의 고토이며 남・북한 통일의 문을 여는 전초기지이고, 아울러 해외인구분산(이민)기지이며 식량안보기지이고, 수자원 기지이기 때문에 우리들 한민족에게는 「꿈과 희망의 땅」이고 이것을 확보해야하는 숙명적 대명제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에 따라 필자는 21세기 한민족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기 위하여 동북아문화교류협회를 중심으로 지금 건설의 첫 삽을 뜨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