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박정희 대통령 추억의 夜話 <제4화>

새마을이 2017. 6. 1. 17:52

칼보지 멜론사건

 

터키는 6.25 한국전쟁 때, 미국영국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장병들을 파견시켰다. 전쟁기간동안 14,936명이 참전했는데 전사 721, 부상 2,147, 실종 175, 포로 234, 비전투원 부상 346명 등 총 3,623명의 인명손실이 있었다.

아시아 지역의 제일 서쪽에 있는 터키는 몽골후예의 혈통이 혼재되어 있어 우리와 매우 닮아 지금도 형제의 나라로 불리고 있다. 특히 한국과의 외교는 독특하다. 19725월에 비자면제, 이듬해(1973) 5월에 한국전쟁 참전기념협회 결성, 19745월에는 양국의 문화협정까지 맺었다. 3년 연속 행사 때마다 총리인 JP는 사절단을 이끌고 다녀오곤 했다.

19735월 말 청와대 본관 부속실 한식주방장인 윤병옥 씨가 오이씨 보다는 훨씬 큰 종자를 몇 알 가져왔다. 각하께서 당신에게 주고 꼭 심어보라는 지시를 했다고 전했다. 터키를 방문한 총리가 멜론을 2개 가져 왔는데, 한 개당 무게가 15정도가 되어 특보실과 수석실 임직원 모두가 먹고도 남았다고 했다. 종자가 나에게 전달된 구체적 내용은 이랬다.

그 날 각하를 비롯한 특보님들과 몇 사람의 수석들께서 이구동성으로 세상에 이처럼 큰 멜론을 처음 보았다 라면서 저울을 가져와 무게를 달아보니 각각 15, 18가 되었는데 의무실 담당의사까지 동원되어 당도측정을 하였는데 16(브릭스)가 나왔다고 했다.

이 멜론이 한국에 재배가능한가에 대하여 농림부를 통하여 농촌진흥청에 의뢰하느냐 등 여러 주장이 있었는데 지난겨울 크리스마스 때 수박재배 및 구입자 조사건을 기억하시는 각하께서 농장장에게 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인데, 멜론 이름이 하도 요상하여 모든 사람이 기억한다면서 그 날 주방장 자신도 먹어보았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그 날 그 멜론처럼 달콤한 것은 처음 맛보았다고 했다.

멜론 이름이 무엇이냐는 재차 질문에 히죽이 웃으면서 칼보지라고 하여 같이 한바탕 웃었다. 몇 군데의 문헌과 주한터키대사관을 방문하여 알아낸 정보는 하네듀 계통의 멜론이고 큰 것은 23이나 된다고 했으며, 고온저습지역의 노지용으로 일조량이 매우 높아야 당도(심지어 23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함)가 오른다는 것이고, 일반창고에서도 60일 이상 저장된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 여름 장맛비를 피할 수 있는 비가림 하우스재배 시설을 하여 파종했고,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추석(9월 말)전후 무게는 도저히 10도 되지 않고 5~7에 불과했고, 1010일경 첫 수확을 했는데 당도는 10도 내외였다. 주방장은 당신 실력이 겨우 이 정도냐라며 비아냥거렸고, 원예시험장의 고향선배인 박상근 박사를 모셔와 진단한 결과 터기에 비교하여 여름장마 때문에 일조량이 터무니없이 모자란다는 것과 토양의 차이가 현저하다는 것을 정리하여 각하께 보고를 올렸다. 각하께서는 강남 감귤이 강북에 오면 탱자가 된다는 논리와 같구먼이라며 실험을 중단하라고 안심시켜 주셨다.

세월이 흘러 1983년 중남미 아이티라는 나라에 새마을 지도사업차 갔다가 그곳에서 가로수로 심겨 잇는 자귀나무(콩과)의 열매 까투리 길이가 30나 되고 열매는 작두콩만큼이나 커서 이것을 가져와 정성껏 키워 3년 만에 열매가 맺었는데 길이가 30는 커녕 10도 되지 않아 문득 칼보지 멜론을 연상했다.

지금도 당시 각하께서는 칼보지가 문제구먼하시면서 파안대소하시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이듬해 8.15일 영부인 서거 이후 파안대소 모습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