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추억의 夜話(제7편)]
집 앞의 새마을공장 외면하고 구로공단으로 가는 농촌처녀
일송재단 국제농업개발원
이병화 연구소장(2017. 9. 4.)
1978년 5월, 당시 필자는 용인 민속촌 인근의 가발수출 회사인 「다나무역」의 종업원(이들을 ‘공순이’ 또는 ‘자야’라고 불렀음)들 가정환경 실태를 파악 중이었는데, 다음 조사지역이 구로공단이라서 설문에 응하는 여성근로자들에게 선물용으로 줄 타월에 ‘대통령 박정희 贈’이라는 글씨 사용허가 신청을 해놓았을 때였다.
필자가 교장으로 재직하던 「신갈농민학교」는 비정규 전문대학 학력인정 교육기관으로 겨울 농한기에는 새마을 지도자들의 소득증대 교육을 실시하곤 했는데, 입소하는 호남지역 지도자 중에는 다나무역에 근무하는 딸을 만나러 오는 것이 목적인 분도 있었다.
그런데 딸을 만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월급이 적어도 구로공단으로 가기를 희망하는데, 이유는 야간학교 진학과 결혼상대의 남자를 만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1978년 전후 구로공단과 인근 공장지대에는 농어촌 출신 처녀 7만여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미성년자를 포함하면 2배가 넘는다는 관할 파출서의 보고도 있었다.
보조요원 두 사람과 함께 파출소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여성근로자인 이들의 면담에서 ‘이곳까지 직장을 찾아오게 된 동기는 가난한 농어촌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100%였고, 이중에는 ‘부모님의 약값과 병원비 조달, 동생들의 교육문제 등 자신이 희생되어 가족이 행복해진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는 참으로 숭고한 뜻을 가지고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야학에서 꿈을 키우고 있었다.
“추석과 명절에 고향 갈 때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자신이 어디에 근무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느냐”는 질문에는 90%가 좋은 직장에서 대우받고 있다고 거짓말 한다고 했다. 고향 갈 때는 서울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치장해가기 때문에 심지어 시골 남자친구도 속는다고 했다. 여기에 ‘대통령 박정희 贈’이라는 글귀가 있는 타월은 최고의 선물이 되어 부모님들은 이것을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하고 네가 시집갈 때 가져가라고 말씀한다고도 했다.
이어서 “여러분들의 고향마을에 새마을공장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면 하숙비도 들지 않고 공장에서 주는 근무복으로 출퇴근도 가능하고 가족들과 생활하면 훨씬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83%가 반대했다.
이유를 묻는 필자에게 “정말 몰라서 묻느냐”면서 집 앞 공장으로 출퇴근하면 그곳에서 받는 월급을 봉투째로 부모님에게 바치고 다시 용돈을 받아 쓰는 구조이지만, 여기에서 내가 알아서 쓰고 나머지 돈을 우체국을 통하여 소액을 보내주어도 통째로 월급봉투 받는 것보다 고향의 부모님은 더 감격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그것이다. 내가 번 돈은 내가 집행해야지, 봉투째 주고 부모님으로부터 다시 받는 행위는 효녀소리는 듣겠지만 결코 자립정신은 아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보고가 못미더웠던지 당시 치안본부장인 김성주에게 「딸을 공장에 보낸 농촌 부모님들의 의식구조 조사」라는 과제를 주어 조사한 결과도 집 앞의 공장을 다니는 자식들의 월급은 당연히 부모가 집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고마움을 못느끼지만 구로공단의 딸이 보내는 동생학비, 내의, 담뱃값, 약값 등에는 감격한다는 것을 알아내었고, 우리들의 보고와 대동소이함을 보였다. 이것은 농촌 부모님들의 의식구조 변화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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