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추억의 야화(野話) 제12편
(2018.3.10.)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이글 을 쓸때 월1회씩 1년 동안 12편만 연제키로 했다.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 별로 없고, 아들 녀석은 외국에 살면서도 이 글을 보는지 왜 지금 이글을 쓰느냐고 나무란다.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보존할 능력이 없어 현재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1978년10월 하순 동아일보 정치부출신의 최원각씨가 경복궁 앞 내자호텔에서 시간나는데로 꼭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몇 일전 대통령각하를 만났는데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면서 전달해줄 내용이 있으니 반드시 만나야 된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병화 불로그「발해의꿈」내용중 박정희대통령 제28주년 추도식을 다녀와서「참조」) 최원각씨는 대통령과 같은 고향출신으로 어릴 때 병정놀이 하면서 놀때 당시 대통령 나이는 13세로, 항상 대장 역할을 했고 자신은 7살로 제일어린 부하 역할을 했었다고 했다 그날 청와대에서는 어릴적 병정놀이 했던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 대통령의 눈에서 눈물을 보았고 눈동자가 풀린 멍한 모습과 문득 대통령의 뒷모습에서 어렴풋이 저승사자를 보았다고도 했다.
최기자는 이승만대통령 시절 필화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는데 옥바라지를 서울시
내 고급요정 마담들이 순번을 정하여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인물이 영화
배우 신성일이나 신영균보다 훨신 출중했다.
또한 그는 사주,팔자,육갑풀이를 잘하고 적중률도 높아 반풍수 역할을 했는데 필자
가 보기에도 신통한점이 많았다.
당시대통령께서는 신갈농민학교가 유명해지고 제대말년의 군대 꼴통들도 입소하여 사람이되어 나온다는 국방장관 출신의 최영희장군과 치안국장 등의 보고서를 읽고 농민학교 부지를 청와대 재산에서 이병화교장 앞으로 전부 넘겨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면서 이말을 꼭 전해주어 용기를 잃지말라고 격려해 주라는 부탁을 받고 “그녀석 부자 되겠습니다”라는 대꾸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사용토록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는 남방개발의 주역인 최계월회장을 비롯하여 남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칠레. 파
라과이 등 식량자원 개발 붐이 한참일 때 였다.
이즈음에 필자는 박정희대통령 으로부터 우리민족이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발해
(渤海)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나라를 색인했다.
1979년 12월12일사태 이후 서빙고호텔을 알았다. 전두환 대통령시절 신갈농민학교는 자영농과 학생들의 필수현장 실습장이 되었고 필자는 농고생들의 필수교과서인「농업발전론」을 집필 했을 뿐만 아니고「농업용수 기능사」라는 자격증을 임의 발급했고 이것은 미국에농업이민 가는 한국인에게는 반드시 소지해야 되는 자격증으로 자리매김했다.한편 신갈 농민학교는 교육당국으로부터 비정규 농업전문대학 학력인증 자격을 부여받아 농민학교 졸업장으로 전문대학 2학년에 편입하기도 했다.이러한 변화속에 농민학교재산은 누가 소유자인지? 어떻게 되는지도 불투명했다.
1984년말 편도여권인「여행자증명서」를 들고 이름도 생소한 아이티. 코스타리카 등 들의 중남미국가에 새마을운동 전수자 출장을 갔고 그곳에서 풍토병이 걸려
귀국 후 6개월간 병상생활을 했다.
1985년 8월15일 육영수여사 제11주기 추도 행사장인 국립묘지에서 만난 김정렴비서실장께서는 “이 사람아, 그동안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는가? 농민학교 농지를 인계 해주려고 서류를 모두 갖추어 두었는데 자네는 주겠다는 재산도 받을 생각은 않고 밤낮 농민학교와 해외 새마을운동에 미쳐 다녔구먼” 하시면서 박진환 특보로부터 인계를 받으라고 지시를 하셨다, 그러면서 구석으로 나를 끌고가서 〞자! 다시정리 해보겠네, 영부인께서 72년 초에 새마을1호 주택을 신축하려고 곗돈 모아놓은 돈640만원은 자네가 받았고, 둘쩨는 농민학교 부지와 실습장인 농지 1만2천여평 구입비용중 대통령께서 직접 지출한 2천7백만원은 대통령각하의 개인 돈이니 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데, 청와대 금고에서 9백만원 지출된 것은 청와대 예산이라 국가
돈일세 명심하도록 당부드리네〝 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5공실세인 고향 선배로부터 입수한 정보는 농민학교가 전문대학으로 인가 난것도 호사다마 식의 문제이지만 농민학교 부지 자체가 전부다 국가소유 라고 잘못알고 있고 이것을 송두리체 빼앗는 모종의 음모가 싹트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국가소유 임대농지내 에있는 새마을 주택(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불록 으로 지었음)은 비공개 무허가 건축물에서 1986년 초에 비로소 가옥대장에 등재 하였다. 당시 까지는 주변에서 제법 괜찮은 고급주택으로 알려저 왔다.
1986년, 어느봄 날 낯선 사람 여럿이 농장과 학교를 둘러 보면서 내가 교장인줄도
모르고 땅 소유주가 누구인가? 학교는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 등을 물었고 필
자는 나름데로 상세히 알려 주었다. 이 땅은 대통령으로부터 하사받은것이나 1만2
천평중 나와같이 고향에서 올라온 사람몫으로 약3천5백평을 짤라 주었고, 이 사
람의 재산에는 정부자금이 단 한푼도 없다! 문제가 된다면 나에게 있다라고 했다.
이 사실을 내가 뫼신 박진환특보와 관련인들 에게 알리고 논의 했더니 김정렴 비서실장의 비서관인 이경식씨(훗날YS시절 경제부총리)와 은희만씨 (박근혜 대통령의 이종오빠)가 몰래 사람을 시켜서 조사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또한 이들은 새마을중앙회 전경환 회장과 공모하여 학교와 농장을 탈취할 목적으로 음,양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이듬해인 87년도 봄 5공실세인 고향선배 덕분으로 농민학교 부지인 농지를 대지
로 전환하여 학교 건물과 함께 10억5천4백만원에 대호건설 이건 회장(훗날 YS
아들 김현철과 관련있는 이상호 이성호의 부친)에게 급하게 처분했다.
단 조건은 농민학교를 영종도 새마을 운동본부가 운영하는 「사회지도자교육원」으로 이관시켜 주는 대신 학교건물을 당분간「국제농업 인력개발원」으로 개칭하여 농업이민 교육을 전담키로 하였고, 외무부 산하 「해외 개발공사」로부터 용역을 받아 딱 1년 반을 운영했다. 이유는 얼마후 한국인들의 해외농업 인력은 희망자가 고갈 되었다.
또한 농민학교를 처분한 돈으로 4억원을 부체청산하고 5천4백만원은 양도세, 남은 돈6억원 으로 「재단법인 국제농업 개발원」을 설립하고.강원도 홍천 내면에 고랭지 농장을 9천평 만들고, 전남구레에 외국인 새마을 연수를 위한 수련장 용으로 10만
평 임야를 장만했다.
대통령의 뜻을 담아 해외정보와 농업으로 성공한 이민자를 찾아서 홍보하는 「월간 상업농 경영」을 창간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식 때 발간을 맞추도록 도와주었다. 농업공무원 해외 연수도 독점하고 잡지발행도 소득이 높아 생긴 돈들은 전부 러시아 연해주 식량영토 확보에 투자 했다.
내가 죽어 저승 가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을 때 각하께서 물려주신 재산은 전부 공익적으로 사용했고, 말씀대로 「해동성국:발해국」에 식량영토를 마련했다고 떳떳하게 고할 작정 이였다.
YS시절은 영부인이 고향사람 이라서 중재를 하는데도 탄압을 받았다. 잡지광고도 줄어들고 정부가 의무적으로 팔아주던 잡지 구입도 중단되고 YS말기에는
재단 부채가 7억원이나 되었다, 그러다 DJ정부시절 연해주 곡물 북한 지원사업
으로 부채는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념이 다른데도 연해주 시각은 같아서 DJ로부터 많은 해택을 받았다.
노무현대통령 시절은 철저히 차단 되었고, MB정권은 해외개발은 열심이였으나 연해주 식량영토 확보에는 외면했다.
박근혜대통령 당선자는 날더러 새마을 운동중앙회를 맡으라고 했으나 청와대 입성후 외면했다. 취임 반년 후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저 왔다. 내용은 내가 산림청부지와 농지를 팔아 수백억원을 착복하여 대통령의 뜻을 거역했다는 것이었다. 검찰청에 고발하여 감옥에 넣는 다고도 했다 나를 모함하는 사람은 역시 은희만 씨와 수행비서 출신 모씨였다.
사실이 아님을 등기서류 등을 때어 보내주면서 세상을 원망했다. 이들의 모함 배경에는 최측근 정모실장이 있었고 이들은 별아별 정보를 수집하여 아버지 대통령 측근들을 모함하고 박근혜대통령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필자의 아들은 아버지의 영역을 맡아 연해주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다. 우리민족이 반드시 회복하고 진출해야 할 발해의 해동성국을 외면하고 어찌 통일을 논 한단 말인가?
나는 지금 매우 힘들고 지쳐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한국인에게 할애해 주겠다는 극동 러시아의 농지 및 자원을 챙기지 못하고 있다. 문득 자식에게 “조국에 충성하고 사회에 봉사하라〃라는 가훈을 거꾸로 표현해야 하지 않나 생각 하면서 이것이 나의 유서가 될 수 있다는 망상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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